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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두진 문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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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박두진

박두진은 일제의 탄압이 극에 달하던 1930년대 말, 어둠을 밝히며 떠오르는 해처럼 문단에 등장했다.


1939년 6월 『문장』(5호)에 정지용 시인의 추천으로 「향현」과 「묘지송」이 발표되면서부터 시인으로서의 첫 걸음을 뗀 박두진은 같은 해 9월 『문장』(8호)에 「낙엽송」, 다음해 1월 『문장』(12호)에 「의(義)」, 「들국화」까지 총 3회의 추천을 받으며 주목을 받는다. 정지용 시인은 당시 박두진의 시에서 나타난 개성을 ‘식물성(植物性)’, ‘신자연(新自然)’이라는 표현으로 소개했다. 박두진은 암울한 시대상황에서도 역동적인 생명의 원천으로서의 ‘자연’을 통해 희망을 노래하는 시인으로 행보를 시작한다. 박두진은 1941년 4월 『문장』이 폐간된 이후에도 일제의 감시를 피해 숨어서 한글로 시작(詩作)을 이어갔다.


이러한 박두진의 인내는 비로소 해방 이후 꽃을 피우게 된다. 1946년 6월, 박두진은 『문장』을 통해 등단한 문우 조지훈 · 박목월과 함께 시집 『청록집』을 발간한다. 박두진은 『청록집』 발간을 계기로 조지훈, 박목월과 함께 ‘청록파’로 불리게 된다. 1946년 『상아탑』에 발표했던 「해」를 표제작으로 삼아 1949년 5월 첫 개인시집 『해』를 발간한다. 일제강점기 후반의 암울한 민족적 현실을 빛의 속성을 지닌 ‘해’를 통해 극복하려는 시적 의지가 보이는 이 시집은 현재까지도 박두진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해방 후 박두진은 다양한 문인 단체에서 중심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문학관(觀)과 문학적 신념을 키워나갔다.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고향 안성과 대구 ‘월배 마을’로 피난을 갔던 박두진은 창공구락부(공군종군문인단)에서 활동을 이어갔고, 공군 기관지 『코메트』, 문예지 『전선문학』 등의 지면을 통해 국군의 활약을 전파하고 전쟁의 고통을 널리 알리는 데에 힘썼다. 전쟁 이후 박두진의 강직한 성정(性情)은 올곧은 지성으로 이어졌다. 이 시기 박두진의 시에서는 왜곡된 현실에 대한 강한 부정과 저항정신, 민족애와 인류애에 헌신하려는 휴머니즘적 정신이 강렬하게 나타난다. 『거미와 성좌』(1961), 『인간밀림』(1963), 『하얀 날개』(1967) 등의 시집은 박두진 시의 중요한 속성 가운데 하나가 준열한 역사의식에 있음을 알려준다.


박두진은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수석과 종교를 통해 새로운 시적 시도를 모색한다. 그의 시세계는 『수석열전』(1973)과 『속 · 수석열전』(1976)에 이르러 자연 · 인간 · 신을 노래하리라 다짐하던 자신의 시적 목표를 성취한다. 박두진의 시는 예술화된 자연으로서의 ‘수석’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신앙 세계의 묘사로 이어진다. 박두진은 『사도행전』(1973), 『고산식물』(1973) 등의 시집을 펴내며 종교적 색채를 드러낸다. 박두진은 총 42편 2,862행의 대작인 『포옹무한』(1981)을 발간하며 자신의 시세계를 집대성한다. 1998년 9월 16일. 8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박두진의 시는 ‘자연 → 역사 → 신성’으로 중심을 옮겨가면서 60여 년 동안 펼쳐졌다. 20여 권의 시집과 1,000여 편의 시, 400편이 넘는 산문을 남긴 박두진은 한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거장으로 우리 가슴 속에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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