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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3·1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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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독립운동의 역사

"2일간의 해방", 전국 3대 실력 항쟁지

만세운동의 전개
  1. 1919
    03.11

    1919.03.11안성에서 일어난 최초의 3·1운동은 1919년 3월 11일, 양성공립보통학교 운동장에서 양성면 덕봉리 출신으로 보성전문학교를 다니던 남진우와 양성면 동리 출신으로 선린상업학교 고원근이 학생들의 시위를 주도하였다.
    읍내에서는 안성장터의 상인들이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1919.03.28읍내면 동리에서 마을 주민 20여명이 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불렀다. 원곡면에서도 주민들이 면사무소 앞에 모여 만세시위를 벌였다.

    1919.03.29읍내 장기리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던 진공필이 수십 명의 주민과 독립만세를 불렀다.

    1919.03.30안성 시장에서 약 1,000여명의 시위대가 태극기를 들고 만세시위를 거세게 펼쳤다.

    1919.03.31읍내에서 여성들이 약 3,000여명의 군중들과 함께 군청과 경찰서, 면사무소 등 일대를 돌며 독립만세를 불렀으며, 밤에는 등불행진을 이어갔다.

  2. 1919
    04.01
    1919.04.01원곡면에서 최은식, 이유석 등이 주도하여 주민 약 1,000여명이 면사무소 앞에서 횃불을 들고 만세고개를 넘어 양성면으로 행진하였다. 양성면에서도 약 1,000여명의 주민들이 면사무소와 주재소를 둘러싸고 만세시위를 전개하다 원곡면 주민들과 합세하여 양성주재소를 방화하고, 우편소를 파괴하였으며, 일본인 상점과 대금업자의 집을 부수었다. 다시 원곡, 양성면 주민들은 면사무소를 습격하여 서류, 집기, 일장기를 불태웠으며, 다음날까지 이어진 시위로 이 지역을 이틀간 해방시켰다.
  3. 1919
    04.02

    1919.04.02원곡면 주민들은 오전에 평택의 경부선 철도를 부수고자 모의하였으나 일본군 수비대가 출병한다는 소식을 듣고서 시위대를 해산하고 피신하였다.
    이죽면(죽산면)에서는 죽산공립보통학교 양재욱과 안재헌 등이 학생 50여명과 함께 교정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고, 두현리 주민 수백명과 함께 죽산주재소와 면사무소로 가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밤에는 약 2,000여명의 군중이 죽산주재소, 우편소, 면사무소를 파괴하였다.
    일죽면에서는 주민 수백명이 면사무소와 주재소에 돌을 던지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1919.04.03삼죽면에서 주민 약 300여명이 면사무소를 공격하고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만세운동 참여자 검거

일제는 시위 진압을 위해 헌병대를 동원하여 경기도에서 가장 격렬하게 만세운동을 전개한 수원과 안성에 4개의 검거반을 파견하였다. 또한 4월 3일 원곡, 양성지역에 조선주차군 제20사단 보병 제40여단 제29연대 병력 25명을 파견하여 경찰과 함께 만세운동 참여자들을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참여자들이 대부분 검속을 피해 피신한 상태여서 야간 수색 등 온갖 방법으로 검거하려고 하였으나 검거수가 부진하였다. 이에 일제 경찰은 원곡면장을 동원해 농사철임을 감안해 자수하면 사면하여 농사를 짓게 해주겠다고 약속하고 4월 19일 현재의 원곡초등학교 뒷산에 모이도록 가족, 친지들에게 피신자들을 설득하게 하였다. 그러나 피신자들이 모이자 헌병대는 몽둥이로 무조건 폭행하고 저항 또는 도망자는 발포하여 총살시켰고, 검거된 자들의 상투를 묶어 30리나 되는 안성경찰서까지 걸어서 연행하였다. 이후 6월 1일 일제는 36명의 병력을 재차 파견하여 경찰과 함께 검거를 다시 실시하였다.

만세운동 후의 피해

안성의 3·1운동은 일제의 통치기관에 대한 파괴와 방화 등 적극적인 시위 항쟁이었고, 3월 11일부터 4월 3일까지 약 6,000여명 이상의 규모로 전 지역에서 전개되었다. 일제는 3월 31일부터 일본군을 투입하여 검거를 시작하였고, 살인·방화·고문·투옥 등 무자비한 만행을 저지르며 약 800여명의 참여자들을 체포하고 276호의 가옥을 방화하였다. 그 결과 현장·옥중·부상 순국자가 26명이 발생하였고, 태형 41명, 177명이 투옥되어 최고 12년의 중죄 형량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1인당 최고 409엔에 달하는 손해배상금을 부담시켰다. 이러한 일제의 가혹한 보복으로 많은 재산상의 손해와 희생이 뒤따랐다.

청년운동과 사회운동

3·1운동 이후 안성에서는 서울 등지에서 전개되던 청년운동, 민족운동, 사회운동 등에 관심을 가졌다. 특히 민족의 실력양성 및 단결을 목표로 무산자 교육, 풍속 교정, 강연과 토론을 통한 신문화 전파 활동이 안성의 청년층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에 1920년 4월 1일 안성청년야학회(安城靑年夜學會)가 조직되어 안성보통학교에서 야학회를 개설하여 아동과 청년에게 법률과 부기 등을 교수하였다. 이어 청년들은 동년 8월 23일 읍내면 동리 신상기독교예배당에서 안성청년회 발기 모임을 갖고, 9월 5일 안성공원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안성청년회는 풍속 교정 활동과 토론회, 강연회, 운동회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시기 안성에는 안성청년회 이외에도 일죽청년회, 죽산청년회, 삼죽청년회가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 단체는 1924년 2월경 삼성청년회(三成靑年會)를 결성해 통합하기로 결정하고, 2월 29일 총회를 열고 죽산청년회를 발족시켰다.

당시 안성의 청년회는 서울의 청년회와 연계를 맺고 있었다. 1927년 2월 서울의 청년회 계열이 참여한 신간회가 창립되면서 안성의 청년회도 신간회 지회설립에 적극 동참하였다. 이에 따라 동년 11월 12일 안성지회를 조직하여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1929년 이후에는 안성의 청년회원 중 일부가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의열투쟁과 광복군

3·1운동 이후 국내외에서는 임시정부와 연계한 수많은 항일단체와 비밀결사가 조직되어 격렬한 무장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일제에 대항하기 위해 다양한 독립운동의 방략이 모색되던 중 일제의 기관 시설 파괴와 밀정, 친일파 등의 처단을 목표로 조직된 의열단(義烈團)과 같은 의열투쟁이 전개되었다. 안성지역 출신 중에서도 이러한 의열투쟁에 참여한 인물이 적지 않았다. 죽산면 장계리 출신인 김태원(金泰源, 1896~1975)은 3·1운동 직후 상하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 참여하였고, 충청도 특파원에 파견되어 국내로 잠입, 선전 활동과 군자금 모집, 철혈단(鐵血團)과 대한독립단을 조직하고 단장으로 활동하다 1920년 8월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받고 투옥되었다. 그리고 금광면 개산리 출신인 유만수(柳萬秀, 1924~1975)는 1945년 5월 조문기(趙文紀)·강윤국(康潤國)과 함께 대한애국청년당(大韓愛國靑年黨)을 비밀리에 조직하고, 동년 7월 24일 부민관에서 열린 아시아민족분격대회의 대회장에 다이너마이트 2개를 설치하여 폭발시켰다.

1940년 9월 임시정부가 창설한 광복군에서 활약한 안성지역 출신 인물들이 있었다. 미양면 강덕리 출신인 심광식(沈光植, 1911~1690)은 1936년 2월 중국 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를 졸업하고, 민족혁명당 중앙당 군사부원이 되어 항일운동에 참여하였다. 1942년 10월에는 임시의원정 의원으로 피선되었고, 1944년 6월 내무부 경위대에서 근무하였으며, 1945년 6월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 서무과장으로 임명되어 광복군 참령(參領)으로 복무하였다. 그리고 미양면 용두리 출신인 홍종윤(洪鍾允, 1917~?)은 1944년 3월 광복군 제1지대에 입대하여 경리출납관으로 근무하였고, 고삼면 봉산리 출신인 박건배(朴建培, 1910~?)는 1945년 5월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하여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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